대단원 평가 · Ⅰ

Ⅰ. 근대 이전 한국사의 이해대단원 평가하기

고조선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사의 큰 흐름을 정치사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연도를 외웠는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이 사료가 무엇을 보여 주는가'를 읽어 낼 수 있는지 점검합니다.

평가 안내

10한사1-01-01 · 고대 국가의 형성과 성장 10한사1-01-02 · 고려의 통치 체제와 지배 세력 10한사1-01-03 · 조선의 성립과 정치 운영 10한사1-01-04 · 조선 후기의 새로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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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대 국가의 형성과 성장 · 10한사1-01-01 · 4문항

문제 110한사1-01-01객관식
다음 사료에서 추론할 수 있는 당시 사회의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려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 일연,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조선」
정답은 ②입니다. 본문은 '풍백·우사·운사(바람·비·구름)'는 농경 사회의 자연 숭배를, '360여 가지 일'은 이미 분화된 직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읽어 냅니다. ①의 철기 수용과 중계 무역은 기원전 194년 위만이 집권한 뒤의 일이고, ③의 제정 분리는 삼한의 특징으로 제정일치였던 고조선과 다릅니다. ④는 아직 왕위 세습이 자리 잡기 전 연맹 단계의 모습입니다.
문제 210한사1-01-01객관식
다음은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의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읽어 낼 수 있는 발해의 인식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예(武藝, 무왕)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며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는다.'고 하였다." — 『속일본기』 권10, 쇼무 천황 신귀 4년(727)
정답은 ④입니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는다'는 표현은 본문이 말한 대로 발해가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분명히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왕'을 자칭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①의 3성 6부 정비는 문왕 대에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룬 일로 이 국서와 시기가 다르고, ③은 무왕 대에 발해가 흑수말갈·당과 대립했다는 본문과 어긋납니다. ②는 발해 자신의 인식이 아니라,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말갈족 국가)으로 격하시키는 중국 측 시각입니다. 본문은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느냐 중국사로 보느냐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역사 논쟁이라고 덧붙입니다.
문제 310한사1-01-01분류
다음 항목을 알맞은 칸에 넣어 보세요. 아직 부족 단위의 자치가 남아 있던 단계인지, 왕을 정점으로 권력이 하나로 모인 단계인지 가려 봅니다.

항목을 누른 뒤 넣을 칸을 누르면 들어가요. 칸에 든 것을 누르고 위 ‘보기’ 칸을 누르면 다시 꺼낼 수 있어요.

연맹왕국·군장 사회의 모습
중앙집권 고대 국가의 표지
본문은 고대 국가가 ① 왕위 세습, ② 율령 반포, ③ 불교 수용, ④ 영토 확장의 네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사출도(부여)·소도(삼한)·책화(동예)는 아직 부족 단위의 자치와 관습이 살아 있던 연맹왕국·군장 사회의 모습입니다. 반면 율령은 관습법을 명문화하고, 불교는 '왕즉불' 사상으로 왕권을 뒷받침하며, 왕위 세습은 부족장 합의를 한 가문의 독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문제 410한사1-01-01객관식
신라의 삼국 통일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①입니다. 본문은 비판론의 근거로 외세 의존, 영토의 축소, 고구려 유민의 이탈을 들고, '남북국 시대'라는 명명이 더 정확하다는 주장을 소개합니다. ②·③·④도 모두 본문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통일 자체를 평가하는 근거는 아닙니다. 고구려의 국력 약화는 수·당의 침입을 막아 내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고, 가야의 좌절과 성왕의 전사는 통일 전쟁보다 앞선 시기의 일입니다. 본문은 긍정론과 비판론을 종합해 '불완전한 통일'로 평가하면서 발해를 한국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다고 밝힙니다.
B

고려의 통치 체제와 지배 세력 · 10한사1-01-02 · 3문항

문제 510한사1-01-02객관식
태조의 기인 제도·사심관 제도와 광종의 노비안검법·과거제가 공통으로 겨냥한 목표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④입니다. 기인 제도는 호족 자제를 개경에 인질로 두는 것이고 사심관 제도는 중앙 관료에게 출신지 통치 책임을 지운 것으로, 둘 다 호족 견제책입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약화시켰고 과거제는 학문적 능력 중심의 신진 관료를 등용해 호족의 관직 독점을 깼습니다. 본문은 광종의 개혁을 호족 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관료 사회로의 전환이라고 정리합니다. ①은 성종의 정책, ②는 훈요 10조의 북진 정책, ③은 오히려 문벌 귀족의 특권입니다.
문제 610한사1-01-02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했는데, 오늘날 학계도 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설로 삼고 있다.
틀립니다. 본문은 오늘날 학계는 신채호의 해석을 일면적이라 보면서도, 묘청의 난이 고려 사회의 이념적 분열을 보여주는 사건임은 인정한다고 밝힙니다. 신채호가 이 사건을 자주·진취 세력의 좌절로 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평가가 곧 학계의 정설이 된 것은 아닙니다. 개경파의 입장에서는 금(여진)이 동아시아 최강이었던 현실과 천도에 드는 비용·혼란도 고려해야 할 사정이었습니다.
문제 710한사1-01-02객관식
다음은 고려 후기 사회 모순의 핵심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이에 맞서 공민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알맞은 것은 무엇일까요?
권문세족은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을 만큼 넓은 토지를 불법으로 차지했고,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 농사를 짓게 했다. 국가의 토지 제도(전시과)가 무너지고, 세금을 낼 백성이 줄어들자 국가 재정도 위기에 빠졌다.
정답은 ③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1366)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다고 하며, 이때 백성은 "성인이 나타나셨다"라며 환영했습니다. ①은 고려 초 광종, ②는 성종의 지방 제도 정비입니다. ④의 도평의사사(도당)는 오히려 권문세족이 장악해 권력을 행사한 기구였습니다.
C

조선의 성립과 정치 운영 · 10한사1-01-03 · 3문항

문제 810한사1-01-03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태종·세조가 시행한 6조 직계제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의 제도였고, 세종·성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는 신권을 존중하는 방향의 제도였다.
옳습니다. 본문은 6조 직계제(태종·세조)는 왕권 강화책이고, 의정부 서사제(세종·성종)는 신권 존중책이라고 정리합니다. 6조 직계제는 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한 제도이고, 의정부 서사제는 세종이 신하들과 협의하는 정치를 펴며 채택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3사의 간쟁·서경·봉박이 더해져, 본문은 왕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사대부와의 합의 속에서 통치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 910한사1-01-03객관식
훈구파가 다음과 같은 모함까지 꾸미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날 궁궐 뒤뜰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쓴 나뭇잎이 발견되었으니, 사람들이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 하였다. 임금이 진노하여 조광조 등을 처벌하였다." — 『중종실록』 14년 11월
정답은 ②입니다. 본문은 조광조가 현량과·향약 보급·소격서 폐지·위훈 삭제를 함께 추진했다고 정리하면서, 그 가운데 위훈 삭제로 위협을 느낀 훈구파가 '주초위왕' 사건을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을 숙청했다고 밝힙니다. 위훈 삭제는 중종반정 공신 가운데 부당하게 책훈된 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조치여서 훈구의 지위와 재산을 곧바로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①·③·④도 모두 조광조의 개혁이지만 훈구의 기득권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고, 이 모함은 곧 기묘사화(1519)로 이어졌습니다.
문제 1010한사1-01-03객관식
다음은 병자호란 때 조정에서 갈린 두 주장입니다. 이 논쟁 끝에 조선이 실제로 걸은 길로 알맞은 것은 무엇일까요?
(척화파 김상헌) "오랑캐의 술수에 빠지면 명을 배신하고 의(義)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주화파 최명길) "강화를 청하는 것이 굴욕이긴 하나, 나라가 망하면 충(忠)도 효(孝)도 행할 수 없습니다. 종묘사직을 보전한 후에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 『인조실록』 14년(1636) 12월
정답은 ④입니다. 본문은 척화는 "오랑캐와는 화친할 수 없다"는 의리·명분의 입장, 주화는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먼저"라는 실리·현실의 입장이며 두 입장 모두 충신의 길이어서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논쟁 끝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했으나 식량 부족과 강화도 함락 소식에 항복했고, 1637년 1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했으며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①은 그보다 앞선 정묘호란(1627)의 강화 조건이고, ②는 광해군이 명의 요청으로 파병하면서도 강홍립에게 "정세를 보아 항복하라"고 지시한 중립 외교와 다릅니다. ③의 북벌은 효종이 준비했으나 청이 이미 동아시아 최강이 된 데다 효종이 갑자기 죽으면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D

조선 후기의 새로운 변화 · 10한사1-01-04 · 3문항

문제 1110한사1-01-04객관식
다음은 영조가 성균관 앞에 세운 탕평비의 비문입니다. 영조가 이 비를 세우던 무렵에 함께 추진한 정책으로 알맞은 것은 무엇일까요?
"두루 사귀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편당 짓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곧 소인의 사사로운 뜻이라(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 『영조실록』 18년(1742) · 탕평비 건립 기록
정답은 ①입니다. 탕평비는 1742년 영조가 성균관 앞에 세운 것으로, 영조는 노론·소론 균형 인사와 함께 이조 전랑의 후임 추천권 폐지(1741)로 붕당 분쟁의 뿌리를 끊고 균역법(1750, 군포를 2필 → 1필로)으로 백성의 부담을 덜려 했습니다. ②는 정조, ③은 흥선대원군, ④는 숙종의 환국 정치로 모두 다른 시기의 일입니다.
문제 1210한사1-01-04객관식
다음 시가 고발하는 폐단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시아비 죽어 이미 상복을 입었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 삼대(三代)의 이름이 모두 군적에 올랐다네 / ⋯ / 이정(里正)이 호통치며 외양간 소까지 끌고 가는구나" — 정약용, 『목민심서』(1818) 수록 「애절양(哀絶陽)」
정답은 ②입니다.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는데도,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린 것은 백골징포·황구첨정이고, 군포를 내지 못하자 이웃과 친족에게 물린 것이 인징·족징입니다. 곧 군정의 문란을 그린 시입니다. ①은 도결 등 전정의 문란, ③은 환곡의 문란으로 같은 삼정에 속하지만 이 시가 직접 그린 대상은 아니며, ④의 서원 특권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배경입니다.
문제 1310한사1-01-04객관식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그 성격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③입니다. 본문은 비변사는 세도 가문의 권력 본부였기에 그 해체가 곧 세도 척결의 시작이라고 설명하며, 대원군은 1865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삼군부를 부활시켰습니다. ①의 서원 철폐는 전국 1,000여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 서원만 남기고 철폐한 것이지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②의 사창제는 환곡을 향촌 자치 운영으로 돌린 제도이지 국가 직영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며, ④의 당백전은 경복궁 중건 비용을 대려고 찍은 화폐로 사실상 인플레이션을 낳아 화폐 경제를 오히려 교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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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기준별 성취도